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학살]]의 정당화는 가능한가 === ||[youtube(if5Xe8HaF4c)]|| 국제법상 [[학살]]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쟁범죄]]이다. 특히 집단학살 당한 대상이 군인조차 아닌 '''"민간인"'''이라면 어떠한 논리를 들고와 주장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국제법상 정당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조건 자체가 없다. >[[커티스 르메이]]: "If we'd lost the war, we'd all have been prosecuted as war criminals."[* 직역하자면, "만약 [[미국|우리]]가 [[제 2차 세계대전|전쟁]]에서 졌다면, 우리 모두는 [[전쟁범죄]]로 기소당했을 것이다."][* [[로버트 맥나마라]]가 인터뷰 도중 커티스 르메이가 이 말을 했었다고 밝혔다.] >----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20/aug/09/dont-let-the-victors-define-morality-hiroshima-was-always-indefensible|Don't let the victors define morality – Hiroshima was always indefensible]] - Kenan Malik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서 수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대량으로 죽는 [[학살]]이 발생했는데도 미국이 전쟁범죄에 대한 전범 재판을 받지 않은 것은 단지 미국이 승전한 연합국의 일원이라서 기소를 당하지도 않고 재판을 받지도 않은 것 뿐이지 정당한 학살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도 사실 모를 일이다. 패전국인 독일 공군 장교들도 민간인 폭격으로는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 당장 커티스 르메이 이상으로 민간인을 상대로 소이탄을 신나게 뿌린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도 포로에 대한 부당한 처우로 기소될뻔하면 했지 민간인을 폭격한 혐의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의 전쟁 지도층이 아닌 민간인들이었다. 물론 일본 군국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조선인들을 차별했고 전쟁을 지지했다. 하지만 모든 일본인들이 전쟁 광신자는 아니었는데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등 다양한 성향을 가지고 전쟁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로 [[맨발의 겐]]의 저자 [[나카자와 케이지]]의 아버지와 같이[* 겐의 일가족은 모두 케이지의 가족을 따왔으며, 특히 겐은 케이지의 오너 캐릭터이다.] 반전 운동을 하고 조선인 차별과 학살에도 반대한 양심 있고 선한 시민들도 당연히 있었으나 이들 역시 원폭의 피해자가 된 것은 매한가지였다. 원폭 투하 지점에는 일본의 전쟁 범죄와는 무관한 어린이들도 살았으며, 거기다 [[일제강점기]] 당시 내지로 끌려오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이주한 [[조선인]]들도 상당했다. 심지어는 [[연합국]] 포로들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전쟁에 찬성한다고 해서 민간인들이 죽어야만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으며 특히 [[민주주의]] 국가의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 원폭 논란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미국이 원폭을 쓰지 않아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지 않았느냐"이다. 굳이 도시 한가운데에 떨어뜨릴 것 없이 도쿄만과 같이 근처 해상에 우선 투하해 무력 시위를 벌여도 일본의 투쟁 의지를 꺾기에는 충분했을 것이고, 그래도 항복하지 않고 죽기 살기로 저항한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투하해도 문제가 없었을 거라는 의견. 그러나 미국이라고 이런 생각을 안 한 게 아니다. 하지만 이 제안은 카미카제, 반자이 어택, 자국민 학살, 집단자결 등을 일삼고 전쟁 전 식민지 유지 따위를 외치는 정신 나간 일본 수뇌부한테 전혀 먹히지 않을 거라 판단한 미국 수뇌부에 의해 기각되었다. 실제로 첫 번째 원자폭탄을 맞고도 [[현실부정]]을 시전한 일본 상층부의 행태를 보면 경고 폭격마저 [[개소리|"신이 지켜주는 일본"]] 따위의 프로파간다로 써먹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원폭 투하 전에도 모든 고위급 인사들이 찬성한 건 아닌데, 이때 반대하던 고위 장성들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체스터 니미츠]] 원수 등도 있었다.[* 일설과 다르게 맥아더와 그의 극동 사령부는 한국전쟁에서도 핵무기 신중론자였다. 한국전쟁 당시 핵무기 사용의지를 적극 피력한 고위인사는 일본 핵 투하에 서명한 트루먼 대통령과 본토 군 사령부 이였다.] 당시 핵폭탄 투하를 승인한 트루먼 대통령도 깊은 후회를 하였는데, "한 나라 지도자들의 외고집 때문에 인구 전체를 없애야 하는 일이 생긴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라며 "앞으론 원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겠다."라고 리처드 러셀 민주당 상원의원에게 쓴 서한이 2015년 8월에 공개됐다.[* 트루먼 역시 분명 원폭에 민간인들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고, 본인도 최종 서명권자로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후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1945년 포츠담 회담에 대한 트루먼의 일기에는 그가 폭탄의 정치적 의미를 아주 분명히 인지했고, 일본도 항복하기 원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세계 대전 종전 70년 만에 공개된 서한이다. [[https://www.yna.co.kr/view/MYH20150811004200038|관련 기사]]. 그리고 혹자는 상륙전을 펼쳤으면 미군 측에 끔직한 피해가 야기될 것이라고 하여 투하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미 당시 미군의 전략폭격으로 일본군에겐 전쟁 수행 능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민간인에게도 죽창과 책상으로 만든 화승총을 쥐어주면서 군사 훈련을 시키면서 맞서 싸우라고 하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열악함과 미군의 물량 공세에도 불구하고 미군 사상자가 꽤 많이 나왔던 건 어디까지나 주 전장이 [[정글]]로 가득 찬 조그만 섬이었는데 우회로가 없었기에 일본군의 방어선을 정면 돌파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베트남 전쟁]]에서 다시 반복되는데, 여기서도 정글을 이용한 [[베트콩]]의 게릴라전으로 미군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같은 섬임에도 면적이 커서 방어선을 충분히 우회기동할 수 있었던 [[뉴기니]]와 [[필리핀]]에선 미군이 일본군을 말 그대로 학살했다. 이로 말미암아 비슷한 환경인 일본 열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영토가 가늘고 길쭉한 모양이라 체감이 안 되지만, 일본의 본토인 4개섬(혼슈, 큐슈, 시코쿠, 홋카이도)의 국토 면적은 오늘날의 독일과 맞먹는다.] 원폭 투하는 엄밀히 따지자면 전쟁에 피로를 느끼던 미국 여론과 트루먼이 민주당 지지율을 상승시키기 위해 빨리 전쟁을 끝내려고 해서 대규모 군사 작전을 시행하기를 꺼렸던 정치적 상황이 맞물려 신무기 실험도 할 겸[* 애초에 맨해튼 프로젝트에 들어간 돈은 한두 푼이 아니다. 그렇기에 핵무기의 위력을 미국 대중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에 대한 정치적 부담도 컸을 것이다.] 투하한 것에 가깝다. 다만 일본의 전쟁 역량이 이미 고갈되어서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중국 본토와 [[동남아시아]]에 배치된 일본군은 아직 팔팔했다. 이는 여전히 일본군에게 연합국 포로나 점령지 민간인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할 역량은 충분히 있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일본이 항복하는 그 순간까지도 수탈과 학살로 인한 점령지의 민간인 사망자가 속출했고, 상술했듯이 미군이 상륙하면 모든 연합국 포로들을 [[학살]]한다는 명령까지 내려둔 상황이었다. 즉, 원폭을 사용하지 않고 [[몰락 작전]]을 최대한 신속하게 끝낸다 한들 무고한 희생자가 대규모로 생기는 것 자체는 막을 수 없었다.[* 이론적으로 [[몰락 작전]]이 진행되는 와중에 모든 전선에서 일본군을 궤멸시킨다는 방법이 있었지만 당시 일본군의 점령지 규모를 보면 굉장히 비현실적이고 엄청난 군사적 희생 역시 예상되었다. 실제로 [[장제스]]도 중국의 완전 해방이 1947년에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 희생자가 일본의 민간인인가 [[아시아]]의 민간인 및 연합국 포로들인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철학, 도덕적으로 봤을 때는 아무리 직접적으로 희생자가 줄었다 하더라도,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핵 폭격을 해서 비교적 소수의 희생으로 끝낸다는 것은 합리적이라는 극단적 [[공리주의]]적인 논리도 있지만, 2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온 이 핵공격이 진정으로 피해자를 최소화하는 방법이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이 원자폭탄으로 인해 죽었기 때문에 서구권에서도 원자폭탄을 2번이나 투하해 민간인들의 엄청난 희생을 자아낸 것이 이러한 [[학살]]이 과연 정당했는가에 대해 심심치 않게 논란이 되고 있다. 아무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지만, 어떠한 핑계와 변명을 붙이고 쉬쉬하려고 해도 명백하게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이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